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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역사관

氣天人은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하여 生과 死를 초월하라.
氣天人이 되려면 개인적인 사소한 감정에 功을 남용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大義를 위한, 天下를 위한 것이라면 능히 공부할 만 하도다.


>기천역사관>원혜상인


원혜상인


  원혜상인은 최근세에 있어서 무예분야는 물론 모든 면에서 당대 최고의 도인(道人)으로 알려져 있다. 원혜상인을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도력이 매우 높은 몇몇 스님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는데 도인의 세계에서 원혜상인의 배분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탄허스님이 원혜상인을 만날 때는 원혜상인에게 3배를 올렸다고 한다. 대양진인이 나중에 하산하여,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이 발포하였을 때에, 대양진인은 호적도 없고 신분이 불확실하여 간첩으로 잡혔는데, 원혜상인을 잘 아는 탄허스님이 대양진인이 그분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보증서를 써줌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양진인은 설악산에서 하산한 후 약30년간 많은 무술가와 도인들을 만났지만 원혜상인만큼 훌륭하고 깊이와 높이를 따를 만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원혜상인의 무공은 대단했다고 한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솔장법’으로 내리치면 벼락을 맞은 듯 재가 되었으며 쌀 한 가마니정도는 공기돌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또한 ‘돌단장’으로 집채 만한 바위를 축구공같이 발로 차 버릴 수 있었으며, 발뒤꿈치로 가볍게 치면 바위가 연탄재처럼 부서졌다. ‘축지법(縮地法)’을 구사했으며 수십미터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고 올라가는 ‘경공법’도 구사했다. 그리고 ‘진법’을 펼칠 수 있어, 대양진인이 수련 중 힘들어 도망치려 해도 ‘진법’ 때문에 수련지역 바깥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원혜상인의 겉모습은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특이한 데가 없었으며 체격은 대양진인보다 약간 크고 일반인보다는 약간 작았다고 하지만, 그 힘은 어떤 장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대양진인이 어렸을 때 보광사의 할아버지 스님이 원혜상인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대양진인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묻자 그 할아버지 스님은 “원혜상인은 내가 너만큼 어렸을 때에도 할아버지였다”고 할 만큼 대단한 나이와 도력을 갖춘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원혜상인은 대양진인이 하산한 지 3년 후인 1973년 162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옛 선인들처럼 그 자취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