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열전 대양진인
기인열전
비전된 전통무예 '기천문'을 유일하게 계승한
진짜 무인 박대양 武에서 有를 찾다
"무협지에 나오는 신비한 무술이 아닌 깨달음을 위한 수양법"
고대로부터 비전(秘傳)되어온 산중 무예 기천문의 계승자인 박대양씨의 삶은 한 조각 구름과 같다.
부모가 누구인지, 나이가 몇인지 모른 채 산중에서 스님의 손에 자랐다. 스님으로부터 전통 무예를 배운 후 속세로 나와 기천무의 대중화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기천문을 무협지에 등장하는 신비한 무술이 아닌 몸과 마음을 닦는 수련의 한 방법으로 알려지길 원하다. 박대양씨의 구름 같은 인생과 기천문의 의미를 소개한다.
취재-졍연지 기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무게도 형체도 이름도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기천(氣天)이라 하느니라,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나니 스쳐보아야 그 위력을 아느니라'
기천본문에서 발행한 <기천>이란 책에 적혀 있는 글이자 전통무예 기천무의 '사부'인 박대양 씨의 생각이다.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되물을 것이다. 기자도 인터뷰를 위해 기천문과 박대양 씨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천문에서 말하는 '기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박대양 씨가 걸어온 예사롭지 않은 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기천의 수련 체계나 기본 자세는 어떻게 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무도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모래밭을 지나는데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박대양 씨의 '무용담'에 이르면 꼭 무협소설을 읽는 듯했다.
자기 성찰과 수련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여러 가지 의문을 품고 기천문 본문(本門)이 있는 서울 도곡동을 찾았다. 본문 도장의 한켠에 마련돼 있는 방에는 산중 무예의 '초대 문주'라는 박대양 씨가 생활한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1백 55센티미터에 50킬로그램이 조금 넘어 보이는 그는 무예의 대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왜소한 몸에 선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차라리 이웃집 아저씨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싶었다. 먼저 기천문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다'라고 간단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천에 대한 명백한 사료나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죠.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질곡의 역사 속에 선조들이 남겨놓은 많은 유산들이 소멸되었다는 건 후손들이 겪어야 할 민족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더라고 기천문의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박대양 씨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기천문이 어떤 무예인지 알 수 있다. 현재는 박대양 씨의 제자들이 기천문의 원리와 수련체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기천문은 민족선도(民族仙道)의 큰 맥을 이어온 전통적인 심신수련법이며, 수천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귀중한 무화유산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천은 말 그대로 기(氣)와 천(天)에 대한 심신 단련이다. 좀더 풀어서 해석하면 형(육체) 단련을 통해 몸에 기를 모아 하늘의 이치를 실현시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 한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도록 한다. 기천문의 실전 응용력이 높아 전통 무예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다.
기천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0년 초, 마지막 진인(眞人)으로 불리는 박대양 씨가 산에서 내려오면서부터이다. 그의 주변에 기천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하나 둘 모이면서 세속의 관심 속으로 파고 들었다.
기천문의 자체 설화에 의하면 기천은 단군시대에 생겼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했다. 기천문의 사상적 근원을 단군사상에 찾는 것도 이러한 유래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급격한 쇠퇴 과정을 밟아 산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산중의 '도인'들에 의해 몸과 입으로 전수되었다.
기천 수련의 원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수련으로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몸과 마음의 수련은 과정일 뿐이지, 궁극적인 목적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있는 것이다.
수련 과정은 크게 정공(靜功)과 동공(東功)의 과정을 거쳐 심법(心法)에 이르는 3단계로 나뉜다. 정공은 정적인 수련으로 개개인이 육체적인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정적인 자세에서 육체의 틀을 짜는 것으로 기천에서 가장 중요시 한다.
동공은 정적인 자세에서 형을 완성한 다음 우리 민족의 흐름이 곡선을 따라 서서히 몸을 움직이며 수련하는 방법이다. 민족 무예차원에서 보면, 우리 민족의 독특한 3박자 흐름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뤄 우리 춤사위와 같은 몸동작이 나온다.
심법은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도 있도록 마음을 닦는 수련법이다. 구도 자세로 마음의 도를 구하는 단계다. 몸 공부를 통해 인내와 끈기를 기르고, 고통을 참아내 자아를 완성하고, 타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수련하여 마음이 하나 되게 하는 단계이다.
기천문은 수행 정도에 따라 일곱 가지 품계로 나뉜다. 품계마다 짧게는 2개월, 길게는 몇 년간의 수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최고 단계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박대양 씨는 최고 단계인 상인(上人)의 바라 밑 단계인 진인(眞人)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박대양 씨와 제자들의 노력 덕분에 현재 기천은 급속히 대중화되고 있다. 일반인들은 물론 입시생에게도 인기가 높다. 집중력을 높이고 잠을 쫓을 수 있다는 회원들의 경험담이 퍼졌기 때문이다.
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산에서 성장
기천문의 대중화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 중 하나는 수련 과정에 심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초보 과정에서 대부분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만둔다. 진인인 박대양 씨의 단계에까지 오르려면 30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수련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기천문에서 가장 기본적인 수련법인 내가신장을 배우기로 했다. 그래야 수련 과정의 어려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천본문의 변치호 원자오가 강난숙 범사(사범)의 설명과 시범이 이어졌다.
내가 신장
"내가신장을 하다 보면 일분 일초마다 고통이 동반됩니다. 순간마다 고통이 찾아오기 때문에 잡념이 일어날 수 없죠. 운동 선수도 3분을 견뎌내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그 고통을 뛰어넘으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법을 알게 되죠. 이것만 제대로 익히면 건강은 문제 없습니다. 특히 무념의 상태로 접어들면서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게 되죠."
변 원장의 설명이 과장이 아니었다. 내가신장를 취한 지 1분 만에 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손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온몸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3분이 지나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몸 이곳 저곳을 옥죄었다. 입에서는 절로 단개가 나는 느낌이었다. "열을 셀 때까지 더 해보자"는 강 범사의 말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내가신장 자세를 풀고 제자리로 돌아오자 주저앉고 싶을 뿐이었다.
일반인들은 3분을 채우기가 힘든 내가신장을 박대양 씨는 편안한 자세처럼 늘 생활에서 취한다고 한다. 어쩌면 너무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천에 입문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을 알고 나면 편안하게 살고 싶은 사람의 속성상 기천을 못 배우지 않았을까.
박대양 씨는 자아가 싹튼 뒤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부모가 누구인지, 언제 태어난 지 모른 채 10대 후반까지 깊은 산중에서 성장했다. 주민등록상에는 195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양부모가 호적에 올린 단순한 숫자일 뿐 정확하지 않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승인 원혜상인의 손에 자랐고, 기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원혜상인은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스승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도의 깊이를 저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기천의 계승자이자 도를 깨우친 선승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스승님은 저의 과거에 대한 어떤 말씀도 해주시지 않았죠. 대신 무예만은 완벽에 가깝게 전수받았습니다.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천의 계승자가 된 것이죠."
그가 하산할 시점인 1970년대는 일본과 중국의 무술이 우리나라 무술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박대양 씨는 민족 전통의 무예가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산중에 묻힌 전통 무예를 일반 사람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온다.
이렇게 해서 그의 파란만장한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다. 전국을 떠돌며 주먹깨나 쓴다는 깡패들이나 무도인과 실력을 겨뤘다.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싸움터에 뛰어들기도 했다. 산중에서는 어디에도 구속될 것이 없는 무예인이었지만, 세속에서는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한낱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무예를 알리고, 생활을 하기 위해 대결을 펼치는 일이 잦아졌다.
"유신정권이 맹위를 펼치던 때 부산 동아대에서 무도 시범을 보인 적이 있어요. 동아대에서 시범을 보이다가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받아 쫓기기도 했지요. 해운대 백사장에서는 부산 최대의 폭력조직과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스승님에게 배운 것은 기술이 아니라 무학이었는데, 너무 값싸게 써먹은 것 같았어요. 젊은 날의 치기로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과거였죠."
한끼의 식사 해결 위해 무도인과 대결
다시 산 속을 들어갔다. 역시 산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스승에게 배운 기천을 하나하나 점검해가며 몸에 익숙해지게 했다. 예전에는 스승이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 하면 되었는데, 독학으로 정리하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기천의 뼈대를 세워나갔다.
"기천문은 신비로운 무술이 아니라 수양의 도입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듯한 무술로 보는 것을 경계합니다. 막힌 기를 뚫어서 건강을 찾고 마음을 다스려 깨우침을 얻는 심신수련법이죠. 제가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도 정신의 깊이입니다. 육체의 수련은 정신의 도를 위한 과정일 뿐이지, 최종 목적은 자아를 완성하는 겁니다."
기천문의 체계가 어느 정도 세워지자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후진을 양성했다. 지금은 현역으로 은퇴한 지 20여 년 가까이 되었고, 이젠 그 역할을 제자들이 맡고 있다. 기천본문의 변치호 원장을 비롯해 계룡산 수련원의 박사규 문주, 상계 도장의 김봉길 원장, 기천의 윤창호 사무총장 등이 1세대 제자들이다.
1세대 제자들이 다음 세대의 제자를 길러냈고, 수많은 기천 수련자들이 생겨났다. 제자들은 기천의 이론적 기초를 다듬는 동시에 대중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기천문은 생활 수련의 한 방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그는 만만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데 드는 생활비의 대부분을 제자들이 챙기고 있다. 무예의 길을 걸어온 남편을 묵묵히 따라준 아내와 별탈 없이 성장하고 있는 자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제가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나왔듯이 아이들도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길 바랍니다. 인생이 어차피 아침에 히가 떴다가 지는 것과 같은데, 무엇을 강요하고 가르치겠습니까. 제 스스로 세상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그저 묵묵히 가족과 세상을 지켜보는 게 제 삶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