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祖師)로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기천은 국조 단군 이래로 내려오던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번이다. 이러한 기천의 공부는 이해가 아닌 체험이요. 그 체험을 통해 느낌에서 느낌으로 전해지는 가르침인 까닭에 그 흔적은 ‘몸짓’과 ‘마음’에 남아 오늘에 전해질뿐, 말이나 글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 현재 기천의 자취에 대한 접근은 그 ‘몸짓’에 대한 해석과 기천의 설화, 그리고 여타 사서(史書) 와의 비교 분석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등의 기록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일련의 치신(治身)의 법이 유행하였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수행법이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사기』나『산해경』등의 고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기천의 오랜 역사들은 거의가 구전의 형태로 전해오고 있다.
중국 선종(禪宗)과의 관계를 담고 있는 ‘천선녀’ 이야기,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신라의 장보고 이야기, ‘솔장법과 조선 효종’ 이야기, ‘거북선과 자의선녀’ 이야기, 또 일제시대 만주에서 있었던 ‘기천과 독립군’ 이야기, 여기에는 동양 문화의 시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민족의 웅장한 기상이 담겨 있으며 특히 조선시대 이후에는 행이무적(行而無跡)의 가르침도 엿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기천’과 같은 공부를 ‘선도(仙道)’라 부르며, 『한국상고사입문(韓國上古入門』과 『조선도교사』등에서는 이 ‘선도’가 중국의 유불선과 다르며 유불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어 왔던 우리의 고유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현묘지도(玄妙之道), 풍류도(風流道) 등으로 불리며 성행했던 선도는 고구려의 조의국선(早衣國仙)제도, 신라의 화랑과 백제의 소도무사(蘇塗武士) 등 국가적으로 제도화하기도 했다. 고려 이후에는 제도적인 장치는 없었지만 민족복원 정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과 한말에는 민족의 위난을 구하려는 의병의 분기나 민족종교의 발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기천’은 신라시대 이후 세상에서는 정통의 모습을 감추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도는 도리나 방법 -건강법, 민속놀이 등- 으로 흔적을 남긴 채 산중으로 들어 간다. 그렇지만 그 정통의 맥은 ‘지킴이’들에 의해 깊은 산중에서 비전(秘傳)되어 면면히 이어지는데, 초기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 조선 말엽께는 그 뿌리가 태백산맥으로 옮겨지고, 현대에 이르러 기천의 마지막 전인이신 대양진인이 설악산에서 하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 민족 성원에게 이 법을 전하라는 선대 문주이신 원혜상인의 가르침에 따라 민족의 숨결을 열고 모든 이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주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